검사이준열사 학술심포지움 발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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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장 전재혁입니다.
이준(李儁)열사에 대해 앞의 문준영 교수께서 조사연구한 것을 기초로 하여 이준의 검찰 혼 정신을 대입하여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책자에 수록된 원고와 내용은 같지만 시간 관계상 순서가 조금 바뀌게 됨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준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검사이고, 최단기 검사였지만 평생 검사정신으로 생을 마감하여 우리의 영원한 검사가 된 분입니다. 국가공동체를 진심으로 고뇌하는 분들은 이 점에 대해 공감하실 것입니다.

1.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은 검찰기능입니다.

인간은 선과 악을 공유한 상태로 태어나 먹이감을 놓고 경쟁하고,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는 본능을 가진 유기체입니다. 이러한 인간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패어플레이입니다. 그리고 원천적으로 경쟁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은 복지로 함께 사는 것이 인간공동체의 기본입니다. 공명정대한 기풍과 배려하는 마음을 생활문화화해 나가는 것이 국가의 기본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공명정대한 기풍을 세우는 국가기능은 검찰에 있고, 배려하는 마음을 생활문화화하는 기능은 정치에 있습니다.
(1) 이것이 공동체 구성원 간 어느 정도 생활문화화 되어 있는 나라가 선진국입니다.
(2) 그렇지 않을 경우 처벌기능과 예방기능을 수행하는 공직자들의 사명이 국가운명을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준 검사의 그 순결한 검사정신이, 오늘날 현실과 이상의 틈에서 고뇌하며 생활해야 하는 대한민국 후배검사들에 의해, 다시 살아나는 현장에서 토론자로서 하고 싶은 말은 ‘이준으로 돌아가라!’는 조언을 해 드리면서 이준의 성격, 활동의 의미, 검찰의 사명 등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2. 대한제국이 망한 이유

o  대한제국은 영세중립국을 목표로 하여 신문명국의 모습을 갖추는 데 주력했습니다. 백열등이 켜진 것은 일본보다 3년이 늦지만 서울에 전차가 달린 것은 일본보다 3년이 빨랐습니다.
또한 광산 개발 등 국토개발 계획과 미국 워싱턴 DC를 모델로 한 서울 도시개조사업, 광산 개발과 철도 부설을 위한 외자 유치, 국고은행 설립과 지폐 발행을 위한 중앙은행 발족 준비완료한 상태였습니다.

1900년대 우리나라는 영세중립국을 지향했고, 중국은 주변국으로부터 조공을 받던 타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일본은 군사강국을 꿈꾸며 준비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중국은 고루했고/ 일본은 영악했으며/한국은 순진했던 것입니다./
o 대한제국이 짧은 기간에 많은 가능성을 보이자 일본은 조기 박멸책을 구사한 것입니다.
o 백성은 단합된 소수에게 굴종만 했던 체제에서 안전보장에 대한 전략전술이 부재하였고, 위에서 말한 무형적 국력이 약하여 나라를 빼앗긴 것입니다. 

우리의 근대사에서 이준은 국가안보와 무형적 국력의 강화를 위한 탁월한 전략적 감각을 갖고, 이의 실현을 위해 노심초사한 애국자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인물입니다.
그의 인물 됨됨이와 애국혼 그리고 동지애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3. 이준의 퍼스낼리티를 엿볼 수 있는 초기 활동

① 이준열사의 나이 12살 때 북청향시에 응하여 합격했으나 나이가 워낙 어려 합격하고도 급제하지는 못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준은 시험지를 들고 나와 북청 남문루에 올라 오가는 사람들에게 부당함을 호소하였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나는 여기에 대해 정말 그랬을까라는 의문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준보다 아랫 세대인 저의 아버지도 13살 때 장가를 갔고, 16살이면 호패를 차던 시절이었고, 더욱이  이준의 행동을 보고 있던 주만복이라는 사람이 이준의 됨됨이를 보고 이준의 할아버지에게 사돈을 삼자며 청혼을 하여 이준이 나이 12살에 장가를 가게 된 것을 보니 이준의 고향에서 구전되고 자료에도 있는 이 말이 사실임이 확실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하튼 이준은 장인의 보살핌으로 학문을 하게 됩니다.

② 17세 때 무작정 상경하여 북청물장수 틈에 끼어 신세를 지다가 대원군이 의정부에서 경운궁에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대원군을 만나러 갑니다. 이준은 운양호 사건 등 나라의 위기 상황에 대해 소견을 말합니다. 대원군은 이를 기특히 여겨 형조판서 김병시 대감에게 소개합니다. 

③ 김병시 대감 역시 이준을 영특하게 보고 자신의 비서 겸 제자로 곁에 두었습니다. 김병시 대감이 늘 이준을 데리고 다닐 정도가 되어 남들이 ‘부대신’이라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북청에서 온 친구에게 김병시 대감의 아들 김용대의 담뱃대로 대접을 하던 중 마침 들어온 김용대가 이를 보고 감히 양반의 담뱃대를 상민이 사용한다며 불쾌감을 표시하자 이준은 “그 따위 양반의 자존심을 버려라. 사람 있고 물건 있지 양반물건이라고 사람위에 있단 말이냐”면서 김용규의 담뱃대를 분지르고, 보따리를 싸서 김병시 집을 떠납니다.

김병시의 아들 김용규는 모욕감을 참을 수 없어 함흥감사 이돈하에게 이준을 체포하여 치욕감을 씻어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돈하는 북청에 사람을 보내 이준을 잡아오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먼저 온 사람이 이준에게 피하라고 귀 띰을 해 주자 이준은 이돈하를 찾아가 “담뱃대 하나로 벌을 준다면 이는 공법이 아니라 사법”이라 역설하였습니다. 이돈하는 이준의 말에 공감하여 오히려 이준을 후히 대접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이준의 격한 성격과 비굴하지 않은 당당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④ 이준은 고향에 가서 26세 때 함경도시(咸鏡道試)에 합격했고, 이준의 나이 30세 때 고향 북청에 경학원(經學院)을 세웁니다. 경학원은 후에 북청농업학교가 되었습니다.
김병시 대감은 이준을 불러 청일전쟁, 동학란 등 복잡한 정세를 설명하면서 순릉참봉을 하면서 조용히 지낼 것을 권합니다. 순릉은 함흥에 있는 이성계 조모의 묘입니다.

⑤ 순릉참봉을 하다가 이준은 37세의 나이에 우리나라 최초의 법관양성소를 거쳐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맨 처음 임명을 받습니다. 
이준은 협기가 강한 성격에다가 검사의 사명감이 합쳐져 탐관오리를 소탕하려는 의욕이 앞서다보니 검사생활 33일 만에 면관 당하게 됩니다. 양화가 악화에 구축 당한 꼴인 것입니다. 

4. 전략가로서의 활동

(1) 미관말직에서는 큰 일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준은 정치사회운동에 돌입합니다.

◎ 극일운동, 반부패준법운동, 교육문화운동, 민권운동, 국채보상운동 등 한말의 사회변동에 영향을 미친 사회운동은 거의 이준이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자료에 간략히 적시해 놓았습니다.

◎ 이와 같은 운동엔 이준의 강한 의협심이 투혼의 동력이 되었고,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가까이한 지식이 논리적 신념체계를 형성시킨 것이라 보아집니다. 

(2) 나라가 한창 어지러웠던 1900년 초에 이준은 이러한 국제상황을 간파한 법률가로서 우리나라 최초로 한미 공수동맹의 체결을 주창한바 있습니다.

(3) 생존의 경쟁 전략

그리고 1907. 4. 20. 대한자강회 초청 YWCA청년들에게 <생존의 경쟁>이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시장경제 원리를 기초로 경쟁의 중요성과 그 원칙을 설파했고, 이 강연에서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내 놓았습니다.
‘땅이크고 인구가 많다하여 큰 나라가 아니고, 땅이 작고 인구가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이다. 위대한 인물은 반드시 조국을 위한 피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이미 104년 전에 노불레스 오블리주를 주창한 것입니다. 

(4) 한국혼 부활 전략: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서도 친러파-친일파-친청파로 나뉘어 패거리 다툼이나 하는 시국상황을 개탄하여 국민의식에 관해 고뇌하면서 <한국혼 부활론>을 썼는데 헤이그로 떠나는 날 부인에게 주고 간 유서와 같은 것으로서 구구절절 애국혼이 묻어 나오는 무형적 국력증강을 위한 명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5 검사 이준의 실천적 정의

이준 검사는 면관된지 10년 후 고종황제에 의해 평리원 검사 겸 특별법원 검사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사회경험과 경륜을 갖춘 이준은 남들이 꺼리거나 해결 지난한 문제에 대해 적법한 판단을 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한 것이 특징이라 할 것입니다.

(1) 당시 풍양 조씨와 남양 홍씨 사이의 분묘분쟁이 있었는데
두 문중 모두 당대의 세도가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손을 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준은 빠른 조사를 통해 사건을 끝냈습니다.

(2) 고종황제의 가까운 친척이 사기를  쳐서 그 누구도 그를 처벌하지 못하고 있던 것을 이준은 그를 잡아 10년을 구형했습니다. 세도가의 범죄에 대해 남이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을 확실하게 엄벌에 처하였다는 점에서 공동체 질서 확립을 위해 존재하는 검찰의 직무에 충실했던 검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사면대상자 관련 이준 검사의 의협심이 극치를 이룬 사건
고종황제가 둘째 아들 재혼가례 때 사면령을 내리고 그 대상자 선정 임무를 이준에게 맡겼는데 법부에서는 명단작성에 관여하려 했고, 이준은 검사의 고유권한임을 내세워 이를 듣지 않고 을사오적을 처치하려다가 되잡혀 구속된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이기(李沂)·홍필주(洪弼周)를 첫머리에 올렸습니다. 
그러나 법부에서 이준이 작성한 명단에 손을 대자 이준 검사는 법부 법무국장을 고소하였습니다. 이에 법부대신 이하영이 하관이 상관을 고소하였다하여 이준을 면관하자 이준은 법부대신 이하영을 고소하였습니다.

부정부패를 소탕하기 위해 노력한 이준을 사랑했던 민중은 이준을 ‘호법신’이라 불렀고, 재판 날에는 많은 민중이 재판정에 몰려들었습니다.
검사의 임무와 사명, 그리고 자존심을 지켜내기 위해 투쟁한 그 올곧은 정신은 오늘의 검사들도 본받아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결 론>

검찰의 기능 중 무엇보다 중요한 기능은 애국 안보기능입니다. 부정부패는 애국안보의 적입니다. 
지위가 높은 자의 부정부패부터 엄정하게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지위가 높은 자의 범법의 폐해는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검사는 더욱 강도 높게 그 폐해를 줄여 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 할 것입니다.

오늘 날 대검 중수부의 폐지가 거론되고 있는바 이는 검찰의 권한이 크냐 작냐는 것이 고려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위층의 범법을 처단하고 예방하는 효율적 기능에 초점을 맞춰야 하며 헌법의 정신에 위배되냐 아니되냐에 근거해야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준의 최후>

끝으로 우리 모두는 이준의 최후에 대해 확실하게 알아둬야 할 것입니다.
이준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서 방청객으로 입장하여 어렵게 얻은 발언기회를 이용하여 일본의 불법적 침략행위를 규탄하다가 ‘우리는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한 사실이 없다’는 고종황제 명의의 조작된 전문을 근거로 퇴장명령을 받자 할복 자결로 항거하였습니다.

일본의 외교관이나 기관원들 간에는 이준 검사의 자결이 정설로 되어 기밀 보고서에도 사용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정미정변사를 근거로 친일 학자들이 이준 검사의 병사설(뺨에 난 종기설, 목에난 종기설, 등창설 등)을 퍼뜨리고 있고, 이준의 할복자결에 조상의 애국행위가 가려질 것을 우려하여 시샘하는 애국지사의 후손들과 종교적 이유로 병사설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있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준의 순국을 ‘자살’, ‘할복분사’라고 표현한 일본 기관의 문서를 첨부했습니다.
이상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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