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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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는 1859년 12월 18일(음)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先親 李秉權, 慈堂 淸州 李氏 사이에서 독자로 출생하였다. 

세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이 모두 작고하여 이준은 할아버지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열사는 17세 때 고향을 떠나 상경하였다. 한말(韓末)의 어지럽던 시절 약관의 나이에 국운을 걱정하며 정객들과 접촉하던 열사는 

대원군(大院君)을 만나게 되고, 열사의 비범함에 매료된 대원군은 열사를 형조판서 김병시(金炳始) 대감에게 소개하였다.

김대감도 열사의 영준한 탁견을 높이 사 자신의 사저에서 수학토록 권유하고 늘 가까이 대하였다.


1884년 열사의 나이 26세 때 함경도시(咸鏡道試)에 장원급제하였다.


1888년 30세 때 고향 북청에 인재양성을 위해 經學院을 설립하였다. 경학원은 후에 북청공립농업학교가 되었다.


1895년 37세 때 우리나라 최초의 법관양성소를 졸업(제1회)한 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는데 강직한 성품과 비리척결의지가 강했던 이준 열사는 

고위층의 압력을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탐관오리들과 마찰을 빚다가 모함을 받아 33일 만에 면관 당했다.


미관말직에서는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없음을 통감한 이준 열사는 서재필(32세), 박영효(35세), 이상재(46세) 등과 함께 나라와 겨레를 좀먹는 

악질적 탐관오리를 규탄하는 한편, 일제의 침략에 맞서 격렬한 저항운동을 펴 나갔다. 이 운동은 우리나라 민주시민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1896년 38세 때 상동교회 청년회장직을 맡았고, 이 후 을사보호조약 반대투쟁 때에는 상동교회에서 전덕기(全德基 22세) 목사와 상소문을 작성하는 등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신앙심은 열사의 희생정신과 불굴의 용기 그리고 공사생활에서의 공정함을 유지하는데 큰 버팀목이 되었다.

             

같은 해에 이준 열사는 「독립협회」평의장 직을 맡아 서재필, 이승만(22세)과 함께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가두연설을 통해 국민계몽을 해 나가다가 

반대파의 모략이 거세지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법과에 입학하였다.

           

1898년 40세 때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독립협회」에 다시 가담하여 독립협회를 「만민공동회」로 개칭하고, 배일(排日)저항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준 열사는 비정(秕政) 탄핵 가두연설로 이승만, 이동녕(26세) 등 17인과 함께 투옥 당하였다.

           

1902년 44세 때 민영환(42세), 이상재(53세), 이용익(45세), 이동휘(30세) 등과 함께 비밀결사 개혁당을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야욕을 폭로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4년 46세 때 일본이 우리나라의 황무지 개간권을 얻으려 하자 이를 막기 위해 「대한보안회」를 조직, 민중운동을 전개하였고, 

대한보안회가 칙령으로 해산 당하자 이를「대한협동회」를 다시 만들어 회장직을 맡아 집요한 투쟁을 전개하여 결국 일본공사로부터 황지문권을 탈환, 황제께 드리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이 때 이준을 시기하는 소인배의 무고로 투옥되었다가 황제의 성은으로 특사 출옥되어 「적십자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같은 해, 일본에 붙어서 한몫 보려는 매국집단인 일진회(一進會)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맞서 「공진회(共進會)」를 조직하여 회장직을 맡아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민권확립, 

자유신장을 내세우며 친일파 대신들이 일삼는 가혹한 징세. 재물약취 등의 비리를 서슴없이 탄핵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항일투쟁과정에서 간신들의 모함에 빠져 검거된 뒤 3년 형을 받고, 6개월간 황주의 고도(孤島)인 철도(鐵島)에 정배당하기도 하였다.


       

1905년 47세 때 이준 열사는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영애 ‘아리스'의 내한을 계기로 ‘한미공수동맹'을 제창하였다.

같은 해 이준은 민영환과 상의한 후 을사보호조약 반대를 위한 국제적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상해로 건너갔다가 민영환이 순국자결하였다는 연락을 받고 통곡하면서 귀국하였다.

       

1906년 48세 때 이준 열사는 「만국청년회」 회장에 취임하여 국제친선운동을 전개하였고, 정부에 ‘國政 구폐 진언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국민교육회」회장에 재선되어 이동휘(34세), 이갑(30세), 안창호(27세), 유근(46세), 유정수(51세), 유승겸(31세), 홍재기(34세) 등과 국민교육운동을 전개하면서 

「보광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보광학교의 야학제도와 같은 학교들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었다.

       

이준 열사는 한북흥학회 회장으로 서우학회와 합동하여 「서북흥학회」를 발족하고, 이갑, 안창호, 이종호(22세) 등과 교육사업에 총력 집중하면서 서북흥학회를 모태로 

「오성학교」(지금의 건국대학교 전신)를 설립하였으며, 「광신중상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인 1906년에 「법안연구회」회장에 취임하여 법안과 법 운영 등에 관해 연구하였고, 이어서 법안연구회를 확대시켜 홍재기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를 조직, 

회장에 취임하여 헌법을 속히 실행하여 인권과 자유가 보장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같은 해에 이준 열사는 평리원 검사를 잠시 거쳐 곧 특별법원 검사에 취임하다. 그 때 열사는 정부에 인재등용론 제안서를 제출하는 한편 법무대신 이하영에게 권고문을 보내어 법조계와 일반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준 열사의 호법정신(護法精神)은 곧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생명적 가치인 법치주의와 준법의식의 실천이었다는 점에서 실천적 선각자의 표징이 되고 있다.


이준 열사가 친일파에 굴하지 않고 투쟁하자 친일파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친일단체 일진회의 모략으로 이준은 매 70대에 면관처분이 내려졌는데 고종황제가 이를 알고, 

면관을 불허하여 매 70대를 얻어맞았고, 매를 맞고도 태연하게 평리원 검사로 출근하여 반대파들이 혀를 내둘렀다. 


고종황제는 이준 열사의 높은 기상에 감복하였고, 친일파들은 이준을 감옥소에 보내려고 온갖 모략과 감시를 하면서 끈질기에 괴롭혔다.

              

1907년(49세) 도산 안창호(30세)와 비밀결사를 조직하였고, 안중근(29세)의 청으로 진남포의 삼흥학교에서 애국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이준 열사는 친일파이자 탐관오리인 이하영, 김낙헌을 고발, 공개재판에서 준엄하게 그 죄상을 추궁하였다.

              

같은 해 이준은 「국채보상연합회」 회장에 취임하여 일본에서 얻어온 차관을 상환코자 국민에게 그 필요성을 호소하는 등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자강회(自彊會)」주최 기독교청년회에서 “생존경쟁” 제하의 국민자각촉구 명연설을 하였고, 같은 해 “한국혼 부활론”을 저작하였다.

              

같은 해인 1907년 5월 이준(49세)은 고종황제의 위임장인 밀조(密詔)를 봉대한 특사가 되어 비밀리에 서울을 출발하여 1907. 5. 21.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38세)을 만나 시베리아를 거쳐‘페테스브르크'에서 이위종(21세)과 합류하여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1907. 6. 25.에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상설 선생은 의정부 참찬을 지내다가 간도에 가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교포자녀 교육에 힘쓰고 있었고, 영어, 불어, 러시아어에 능통한 이위종 선생은 

페테스부르크 주재 한국공사관 참사관을 지내다가 을사조약으로 공사관이 철수한 후에도 러시아에 남아있었다.


3인의 사절은 헤이그에서 각국 대표와 언론에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불법성 그리고 일제의 침략성을 알리는 활동을 하였고, 7월 14일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행위를 세계에 호소하였으나 열국의 냉담한 반응에 할복 자결로 대한인의 독립의지를 보여주었다.

              

일제는 이준 열사의 사망에 대해 병사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일제의 조선통감부는 궐석재판을 통해 작고한 이준 열사에게 종신징역형을 선고하였다.

              

열사가 가신지 38년째인 1945년에 조국광복이 이루어졌고, 바로 그 해에 독립협회 사건 때 이상재 선생에게 무죄 선고하여 파면된 전력이 있는 

독립투사 함태영(뒤에 부통령이됨)선생이 중심이 되어 본 이준열사기념사업회를 결성하였다.

              

열사가 가신지 55년째인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열사가 가신지 56년째인 1963년 10월 4일 헤이그에서 열사의 유해를 모셔다가 국민장을 거행하고, 서울 강북구 수유리 묘소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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