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찍이 교육입국 의식 정립, 30세 때 고향에 학교 설립
▶ 국민교육운동 전개하며 동지들과 많은 학교 설립(북청공립농업학교 전신인 경학원, 보광학교, 건국대학교 전신인 오성학교, 광신중상업고등학교 등)
▶ 시장경제의 경쟁원리를 최초로 설파
▶ 국제정세와 조국의 운명에 대한 명확한 분석과 예측
▶ 금붙이 팔아 유학생 지원하는 최초의 자발적 국민운동 전개
● 국민교육운동 전개
이준 열사는 1888년 30세 때 고향 북청에 인재양성을 위해 經學院을 설립하였다.
경학원은 후에 북청공립농업학교가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국민교육회」회장에 재선되어 이동휘(34세), 이갑(30세), 안창호(29세), 유근(46세), 유정수(51세), 유승겸(31세), 홍재기((34세) 등과 국민교육운동을 전개하면서 보광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보광학교의 야학제도와 같은 학교들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었다.
또한 한북흥학회 회장으로 서우학회와 합동하여 「서북흥학회」를 발족하고, 이갑, 안창호, 이종호(22세) 등과 교육사업에 총력 집중하면서 서북흥학회를 모태로 「오성학교」(지금의 건국대학교 전신)를 설립하였으며,
「광신중상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황제특사로 헤이그로 가기 전에 도산 안창호(30세)와 비밀결사를 조직하였고, 안중근(29세)의 청으로 진남포의 삼흥학교에서 애국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 경학원
우리나라가 개화기에 외세의 침투로 위기에 처해있을 때 국가의 번영과 민족의 활로는 오직 후진육성뿐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근대 교육기관의 설립이 절실함을 주창하신 이 준선생께서는 1888년 구국일념으로 향리(鄕里)에 돌아와 사유 토지를 희사하여 고향인 北靑에 경학원을 설립하였다.
그 후부터 15세에서 30세되는 실력 있는 선비를 선발하여 경학원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하고 초시(初試)에 합격된 선비는 경학원의 추천으로
서울에서 과시 (科試)에 응하게 되니 北靑의 많은 선비들의 중앙진출이 다른 고을보다 많아지고 따라서 북청의 개화가 빨라진 것이다.
그리고 보니 이 경학원은 북청인재육성의 큰 구실을 하였으며 오늘날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신교육도 이 준선생의 창학정신과 상통되는 맥이 된다고 보겠다.
경학원 자리에 북청농업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1930년대 모습)
순 릉(태조 이성계의 조모 경순왕후의 능 : 함경남도 흥남시 마전리)
순릉참봉 때의 이 준의 모습(1894. 8월 당 36세)
▶ 법관양성소 제1회 졸업생
1895년 4월 16일 법관양성소 입학
1895년 11월 10일 위 양성소 제1회 졸업
▶ 법관양성소 제1회 졸업생(1895년)
咸台永, 李種雨, 李麟相, 徐相喜, 李容成, 高殷相, 徐寅洙, 洪龍杓, 李容卨, 林炳應, 尹性普, 鄭樂憲, 李豊儀, 朴斌秉, 具健書, 金勉弼, 洪鐘翰,
金丙濟, 李容相, 尹衡重, 鄭藎敎, 元容卨, 柳志淵, 趙漢緯, 金翼熙, 韓鏞敎, 李璿在(李 儁), 吳世俊, 兪鶴周, 尹熙衡, 韓成潤, 柳學根,
曺世煥, 李兢洙, 鄭雲哲, 崔來鶴, 權興洙, 鄭永澤, 延 浚, 尹相直, 朴廷煥, 李道相, 李行善, 李完榮, 鄭變朝, 李徹承, 權重璿
▶ 상동교회 (현, 중구남창동 1번지 새로나백화점 7층)
이 준은 전덕기(全德基) 목사와 상동(尙洞) 예배당 만국청년회 (萬國淸年會)와의 관계가 인연이 되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유배(皮島)중 예수의 성스러운 희생 정신이 십자가의 의의를 나타낸 것으로 해 야 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것이다.
따라서 일성은 공사의 생활에서 기독교정 신을 잃지 않았다.
상동교회 뒷방은 헤이그 특사 사건의 온상
이 준은 상동교회 청년회장으로 있으면서, 1905년 을사보호조약 반대투쟁 때에는 이미 전덕기 목사와 함께 상동교회에 모여 상소 운동을 주동하고 제일차 상소문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전 부통령 이시영의 친형 이회영은 만국평화회의 특사파견을 절호의 기회로 을사보호조약의 무효선언을 결심하고,
내시를 통하여 고종황제 (경운궁〈덕수궁〉에 감금상태로 있어 접근하기 어려움)께 의사전달을 하니 곧 대표파견을 허락하였다.
이때 이회영은 상동교회 청년회장이었던 이 준을 추천하여 황제의 인준을 받게 하였다. 그 후 상동교회 뒷방은 헤이그 특사사건의 온상이라고도 하겠다.
법관시절 일성 이 준 선생
● 국민의식 계몽운동
-독립관 국민대연설
-한남대학교 개교식에서의 연설
-YMCA에서의 대한자강회 주최 강연
● 이일정 여사의 유학생 돕기 기고문
이일정(李一貞) 여사의 기고
(이 준 열사의 부인)
당시의 언론보도(1907년 2월 19일(음 丁未 1월 7일) 대한매일신보 제442호)
일진회가 보낸 21명의 유학생이 학자금이 없어 곤경에 빠져 있으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하고 결심하여 공부하고 있다는 보도를 보고 그 당시 부인이 상점을 경영하던 때라 이익금 얼마와 평소에 살림살이에서
절약하여 모아 두었던 돈 21환을(즉 유학생 1인에게 1환씩)보내기로 하고 책 한권씩이라도 더 사서 보고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에 더욱 열심하라는 격려의 편지를 부쳤다.
이때 이일정여사의 편지와 구류청에 있는 이 준과 관계되는 보도를 들어본다.
이러한 이일정의 기사가 발표되자, 사람들은 감동하여 호응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이동신(李東信)이라는 여성이 찾아와서 치하하고 적극적으로 이 일본 유학생의 단지한 21명을 위하여 의연금을 널리 모집하여 그 학생들이 대성하도록 장학 사업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일정도 곧 찬동하고 같이 활동하기로 하였으나 부군이 구류중에 있으므로 사건이 해결되기까지는 근신의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표면적인 활동은 이동선에게 맡겼다.
이 장학회는 그 당시 장안의 부녀 수가 십만을 헤아리니까 장안의 부녀를 우선 망라하자는 것으로 이일정이 의연금의 글을 짓게 되었다.
일본 단지 학생 의연금 모집문(1907년 3월 31일)
대한매일신보 제475호 잡보
「옛사람이 말하기를 정성이 지극하면 금석도 뚫어지고 또 다시 일으기를 모사는 재인이라 하였으니 정성이 지극하고 꾀하기를 정잘하면 못될일이
없을 것은 확실히 알리로다 슬프다 우리 대한나라 체재 어떠한가 남의 굴레 못면하고 대접은 어찌받나 남의 노예되였도다 은영총모관원들도 피인에게
반말듣고 그다음은 해라하니 그 체모 그 신세에 재산은 무엇하며 호사는 무엇하나 그 천대를 받드래도 일종이나 부지해야 불행중 살겠난대 울밀한 솔밧속에
무삼초목 잘아던가 우리 조상살던 토지 누애먹듯 없어지고 우리 동포자매들은 솔밧속에 풀스듯 잠소암삭 업서짐은 파란국이 증거로세 철도지단 군용지로
이리 저리 빼앗길줄 그 뉘라서 뜻해스며 재정 권리 차지하야 저의끼리 분석할 줄 꿈에나 생각했나 불상한 우리동포 땀흘리며 애써번돈 그 아니원통한가
지난일은 그만두고 내두사나 의논하세 금사망을 버서메고 로예문서권차즈려면 무엇이 량책인가 지식없인 무가내오 지식을 구하랴면 교육이 근본일만
교육을 하랴하면 정신배양수장이오 그 정신을 길너줌은 우리 일반동포로세 아련하고 장하도다 단지학생 이십일인 누구 위해 열심인가 나라일에 피흘렸네
부모병환 단지함은 효자라고 닐으나니 나라병에 단자함은 충의지사 분명하다 단지본의 어대있나 지성감천 뿐이로다 한사람의 성의로도 하날이 감동커든
이십일인 그 정성이 하날에 사모치며 국권회복 어려울가 충정공의 목에 피난 전국인의 기름이오 이십일인 손에 피난 국권회복 꽃이로다 그 꽃이 생긴후난
열매보기 시급하고 열매를 보랴하면 그 꽃남게 물을 주어 배양않고 어찌하나 각사회 유지인사 의연금을 모집하야 물주기를 힘들쓸제 우리녀자 사회중에
부인상점 리일정씨 이십일환개시하니 녀자생광되지만은 남녀를 물론하고 국민으로난 일반이오 수효도 비등하니 남자가 일원내면 우리난 일전내여
돈수효난 적을망정 성의야 못할가 국권이 끈어지면 국고금은 고사하고 사삿재물보전할가 의복을 하자한들 천대를 면할손가 재물 액겨 무엇하며
호사하야 무엇하나 여보시오 여보시오 녀자사회 형님네들 우리 비록 녀자로대 나라관에 지중하니 형세대로 일마식을 깃부게 내계되면 하날이 감응 키난
남자보다 나흘지라 녀자의 원악함이 하날에 삼으치되 오월에 서리오고 삼년감을 들었나니 우리 정성 미치난 곳 원수도 감흘터오 국권회복 무란하니 꽃나무에
물주기를 지성으로 힘써 보세 한번이나 주고말면 그 다음은 어찌하나 우리 장안녀자 수가 십만명에 갓가우니 하지하의 일전으로 상지상에
십백환을 일제이추렴하야 죠흔 방법 강구하야 보전은 세워두고 달달이 변리따서 더 꽃답게 물을 주면 조럽하야 결실까지 근심없이 공부하고 그 학생뿐 아니라
간구한 유학동포만이 길러도라와서 나라집에 기동되야 나라집을 중슈하고 문명부강되게 되면 녀자사회 따라 열녀자유권리 확실하니 재정도 풍족하고 대접도
상등밧네 그때가서 돈도 벌고 의복음식 호사하야 평생 안락하여보세 집안이 간구한데 호사를 조와하면 욕먹기를 자청이오 검소함을 주장하면 칭찬맛고 리있었네
비단대신 명주입고 순금대신 은가저도 신체생명 손해없고 출입한들 뒤막을가 무당판수 불공숭 상복록은 고사하고 하날님이 보사 영화를 주시나니 그런 대신 쓰난체로
십시일반 보조하면 큰 사업이 안일손가 이 말을 미친말로 아지말고 남의 사정 생각하소 반을 노질으기가 지극히 어렵기든 내손으로 목지르고 손가락 끈을 적에
피가 오작 글어스며 그 결심이었더한가 누구위해 피흘렷나 부모처자 상관없고 우리 나라 위함이오 우리동포 위함일세 동포위하야 그 지경에 약간재산 보조하길
언은 누가 근지할가 우리동포 누구던지 즐겁게 연죠하면 천지신명 감응하야 국가중흥 인민부강 확실이 밋을바니 깁히깁히 생각하야 우리나라 회복하사이다
완
광무 십일년 월 일 발긔인 리동신
이 글이 신문에 보도되자 장안 유지의 부녀들은 이일정의 본을 받아 희사하는 이가 속출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에 있는 단지 유학생 21명의 급한 것을 구하는데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