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평화를 논하던 제2차 만국평화회의장(1907.6.15-10.20)
이 준열사의 할복자결에 새파렇게 질린 각국 대표들(1907.7.14)
잠시 얼굴을 돌려 뒤를 돌아보고 있던 그 때의 대표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
90년이 지난 오늘(1997), 그 집(de Ridderzaal)은 아직 그 자리에서 ‘法의 神’ , ‘正義의 神’ 그리고 ‘平和의 神’ 을 부르던 한국 대표들의 처절한 그 날의 절규를 오늘의 세계인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일본의 간계(奸計)
한국 특사들의 이러한 활약상이 매일 전세계에 보도되자 당황한 일제의 격노는 극도에 달했다. 이 때 헤이그 주제 일본공사와 서울의 이등(伊藤)통감 사이에는 중대 음모가 추진되었다.
즉 헤이그 주재 일본 공사로 하여금 평화회의에서 한국대표를 배척하도록 각국 대표들을 설득하는 한편, 총검으로 고종황제를 위협하여 밀사를 보낸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게끔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음모가 회의장에 회전(回電)되자 난처해진 넬리도프 의장은 그 책임을 모면하기 위하여 형식상의 초청국인 네덜란드 정부에 그 조치를 떠 맡겼다. 네덜란드는 을사보호조약을 들먹이며 외교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단정하여 우리 대표들의 참석과 발언을 거부하였다.
세 특사의 비장한 각오
이리하여 회의석상에서의 정식 발언은 끝끝내 거부되었으며 결국 우리 대표단은 최종적인 비장한 각오를 하기에 이르렀다. 즉, 정식으로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비공식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우리의 주장을 각국 대표들에게 호소하여야 한다고 결심하고 7월 14일의 회의장에 임하였다.
47개국의 위원들에게 소위 평화회의의 본지에 입각하여 일제의 일방적인 보호권을 파기할 것을 주창하고, 약소국에 대한 무력침략을 응징하는 대일항의를 호소하고자 하였는데 그것마저 거부되었다.
일성 이 준의 장렬한 최후
각국 위원들은 이 준선생을 비롯한 세 특사에게 많은 동정을 하면서도 형식상의 구비 여건이 불충분하다는 이유를 들어 퇴장을 명하였다.
바로 이 때 이 준특사는 의분을 참지 못하여 결연히 일어나 일본의 간계(好計)와 방해공작을 폭로하고 야만적인 침략을 규탄하고 약소민족의 희생을 묵과하는 강국의 처사를 논박하였다.
일성은 최후의 비장한 말을 마치자 미리 준비하였던 보검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각국 대표들은 희생이란 말에 다소 의심은 하였지만 설마하고 있었는데 특사 이 준이 별안간 칼을 빼어들므로 너무도 의외의 일이요, 갑작스러운 일이라 각국 대표들은 놀래어 어리둥절했다. 회의장내의 경호원의 손이 미처 가기 전에 일성은 연설대 위에 선채로,
“대한독립 만세! 세계 약소국가 만세!"
를 크게 외친 후 단숨에 쥐었던 칼로 배를 갈랐다. 솟구치는 신성한 선혈을 만국 사선 앞에 뿌리고는 쓰러졌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좌석에서 일어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이 준을 붙들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두 특사는 이 준을 붙잡고 대성통곡을 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각국 사신, 보도기관, 방청하던 인사들은 조용히 이 준 특사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이윽고 두 특사는 이 준 특사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 이 준의 시선을 모시고 숙박하고 있는 호텔로 갔다.
이 준 특사의 장례 때에 각국 대표들은 서로 상의하여 조위금을 냈으며, 그 돈으로 통한의 이역만리의 타국땅,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장지를 마련, 안장하였다.
*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며, 위대한 인물은 반드시 조국을 위하여 조국의 생명의 피가 되어야 한다.
* 만번 꺾어도 꺾이지 않는 자주독립심은 천만의 강한 병력으로도 깨뜨릴 수 없다.
선생이 즐겨 쓰던 명언이 새삼스레 떠오르게 된다.
이 준 특사의 자결을 보도한 신문 호외
대한매일신보 • 황성신문 호외(1907.7.19)
미국 위원의 표의
특사들은 미국 위원 시옷트씨에게 한국의 항의서를 기고하였는데 시옷트씨는 한국에 대하여 미국의 호의를 표하고 항의서에 대하여 개정할 것을 얻기 위하여 미정부에 문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대한매일신보(1907.7. 17)
대한매일신보 호외(1907.7.19)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인하여 고종황제가 황태자에게 국정을 대신하게 했다. 즉, 일본은 고종황제에게 책임을 물어 폐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케 했다.
경향신문 호외(1907.7.19)
이준열사의묘역조성
1907년 7월 14일 세계평화를 논하던 제2차 만국평화회의 장에서 일제의 침략 행위를 세계 만방에 호소하고 할복 자결한 이 준 열사의 시신은 네덜란드 정부의 호의로 정성껏 거두어 헤이그 「뉴에그두빈」에 그 묘역을 조성하였다.
헤이그 「뉴에그두빈」에 세워진 이 준열사 묘비
당시 의장이었던 러시아의 넬리도프 백작과 미국 대표 시옷트를 비롯하여 많은 사신들이 모여서 우국충정을 찬양하는 위령제를 지냈다. 이 때 러시아의 넬리도프 백작과 미국 대표는 다음과 같은 추도사를 하였다.
“한국 특사 이 준선생의 영혼은 영구 불변할 것이다. 바 라건대 한국이 어서 완전한 자주 독립국이 되어 이 영구를 반장(返葬)하는 날이 하루라도 속히 돌아오도록 빌어 마지 않는다"
조출한 위령제가 끝난 후 묘 주위에는 철책을 둘러 호위 하고 묘 앞에는 대리석으로 된 묘표를 세웠다.
이 준 열사 묘비 (1907.7)
•묘 지(墓 誌)이 준(李 儁)
「1859년 한국 북청에서 출생하여
1907년 화란 공화국 헤이그에서 순절하다」
•비문의
「李 儁」 은 이상설의 조필
「英 文」 은 이위종의 조필
묘역 정화 (1972.5)
좌측 비문
이 준열사는 1859년 대한민국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매 열사는 결연히 일어나 주권 회복 운동에 앞장서던 중 고종황제로부터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을사 보호조약이 우리의 뜻이 아님을 밝히라는 밀령을 받고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장도에 올랐다. 헤이그에서 평화회의가 열리던날 열사 등은 의장을 방문하고 황제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달하였으나 일본대표의 방해로 회의참석자격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열사는 죽음으로써 한민족의 자주독립의 염원과 기개를 온세계에 떨쳤으나 때는 1907년 7월 14일이었다 열사의 유해는 56년 동안 이 자리에 묻혀 있다가 1963년 열사가 그렇게도 그리던 자주독립의 조국 대한민국의 품에 돌아가 서울북쪽 슈유리 묘소에 안장되고 1972년 네델란드 정부의 협조로 대한민국 정부가 이 자리에 기념비를 세웠다.
조일문은 글을 짓고 이선하는 글씨를 썼다.
1972년 5월 일
우측 비문
이 준 열사 추념비
건립자 대한민국 주화란대사관
후 원 일성 이준열사 기념사업회
한화협회 주화란한국인회
찬 조 한국일보사장 장기영
범양전용선사장 박건석
1972년 5월 일
알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