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 봉환 국민장
이 준 열사의 유해 56년만에 환국
이 준열사의 유해 봉환 직전에 네덜란드 여왕이 보낸 화환을 백선엽 대사가 헤이그 묘소 앞에 놓고 있다.
1963년 9월 26일 아침 9시 30분 백선엽 주불대사(화란대사 겸임)와 한국전 참전 용사 그리고 화란군 장교 4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준열사 헤이그 묘소의 발굴 작업이 시작 되었다.
열사의 유해가 비행기편으로 네덜란드를 떠나
동경에 도착 주일 한국대사관에 안치되었다(1963. 9. 27)
황제의 특사로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구국의 장도에 올랐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역에서 순국한지 반세기를 지난 후 백골이 되어 조국의 땅으로 돌아오다.
무언의 환국 열사의 유해가 김포국제공항에 안착하였다. (1963. 9. 30)
일성 이 준열사 유해봉환 및 국민장 공고
1. 영봉식 일시 : 1963년 9월 30일 오후 1시
장소: 김포국제공항2. 봉안소 장소 : 건국대학교 구내(낙원동 소재)
3. 봉안식 일시 : 1963년 10월 4일 오전 10시
장소 : 서울운동장4. 하관식 일시 : 1963년 10월 4일 오후 3시 30분
장소 : 수유리묘소
이 준선생은 투철한 교육이념으로 일찍이 서북학회(西北學會)를 모태로 하여 지금의 건국대학교 전신인 오성(五星) 학교를 종로구 낙원동에 설립, 이 갑, 안창호, 이종호 등과 교육사업을 일으키고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곳으로 특히 낙원동 건국대와는 인연이 깊다.
종로구 낙원동에 있는 건국대학교 총장실에서 대담하고 있는 열사의 따님 이종숙(李鍾肅)여사
(좌로부터 3번째. 1963. 10.)
유해 안치소(건국대학교 부총장실)
(1963. 10. 종로구 낙원동)
국민장 후 유족들의 모습
따님 이종숙여사(중앙)와 외손녀 류성천 여사(우측 첫번째)
조국의 땅 수유리 묘소에 안장
유해봉환 국민장으로 수유리 묘소에 안장(1963년 10월 4일)
수유리 묘는 60cm 정도의 많은 대리석으로 쌓아 올린 길이 40m 높이 5m의 凸자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열사의 흉상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화란식으로 된 묘형을 본따 묘를 만들고 앞에는 상석(床右)이 놓여 있다.
왼쪽에는 동판으로 된 열사의 약력 비문이 새겨져 있다.
동판 비문
水踰里墓所銅版碑文
烈士李儁先生은朝鮮王朝哲宗王十年西紀一八五九年陰十二月十八日未時에 咸鏡南道北靑郡俗厚面中山里龍田洞에서誕生하였다.考諱秉瓘妣淸州李氏祖考諱命變先祖는李氏王朝創業主인太祖大王諱成桂의令伯인完豊大君諱元桂이요桓祖大王의長男이다.先生의幼諱性在字汝天이요鄕科를볼때에는諱璿在字舜七이요後日에號를海玉또는 一醒이라하였다. 三歲때에兩親이돌아가시고祖父의앞에서長成하였다. 天姿英偉한先生은十二歲에鄕試에應하여그文詞는世人을驚歎케하였고十七歲에大志를품고上京하여 戚里金炳始相公宗親大院君儒林의名流안勉菴崔益鉉과接濟하여超人의才士임이認定되었다.때마침淸日戰爭의뒤를이어이나라近代化運動이싹트자法官養成所를卒業檢事에就任하였으나 大官彈劾으로退官하였다. 美國에서돌아온徐載弼博士와함께獨立協會에盡瘁評議長으로서 保守派와의鬪爭으로身邊이危險하게되자原法部大臣張博과함께日本에亡命하여早稻田大學을卒業 歸國後에는協會의後身인萬民共同會에서諤한正論을펴는同時에志士閔泳換 李商奠과秘密히改革黨結成을進行하다가일이漏洩되어成果를얻지못하였다.一九○四年에俄日戰爭이일어나자祖國의危機를豫感하고當時度支部大臣李容翊과함께韓國의嚴正中立을宣言하게하였다.戰爭中日本은韓日議定書를勒成하고戰後에侵略이더욱加重하자 上海로가서列國의與論喚起로乙巳條約阻止에힘쓰는同時에마침美國大統領데오더루스벨트의令孃의來韓을契機로 韓美攻守同盟을劃策하였으나英日同盟中인國際情勢不利로大厦旣傾挽回할수없었다. 一九○五年十一月十七日에日使伊藤博文이우리君臣을兵威로强壓하고 乙已保護條約의國恥가오게되자 志士閔泳煥趙秉世洪萬植宋秉璿等이뒤이어殉國하고擧國이激憤하였었다.先生은慨然히戰線에나서서雷勵風飛至銷人으로救國에挺身하였었다.大韓自强會共進會結社로民衆을覺醒시키기에全力하면서때로는日本이强占한荒地開墾權의奪還貪官汚吏의彈劾으로 黃州鐵島에定配되는苦難도겪었고때로는內政改革을爲하여平理院檢事로서 恩赦案의不公汚濁을들어서法部大臣李夏榮을告發하여法의嚴正을밝히려고하였였다.日債를갚으려國價報償運動의先頭에서기도하고國民敎育會西北興學會에靑年志士安昌浩李甲等과協力하여 五星學校經營으로愛國靑年을養成하고安重根經營의三興學校에가서 愛國魂喚起에도힘쓰는等鞠躬盡瘁하였었다.國家의近代化에憲政實施가先決임을痛感하고憲政硏究會를結成하여그會長으로있으면서우선人材登庸으로內政의革新을企劃하였다.그러나이때는이미日本이勒成한保護條約때문에모든經綸이때阻止되고水泡化되므로 當面의火急은이鐵鎖로斷絶함에있다고본先生은生命을내걸고이를爲하여싸우기로하였다.때마침和蘭國海牙에서俄帝의發議로第二回萬國平和會議가열리자前議政府參贊李相卨과함께高宗帝의親任을얻어그會議에提訴하여日本의羈糾을斷絶하려하였다.帝의親書를지니고水陸의萬里遠程을거처俄京에서同志李瑋鍾과함께먼저俄帝의後援을얻고이어서 美國人헐버트의周旋으로美國代表의同情을얻어會議場에써日本의侵略과殘虐으로勒約임을痛論하는同時에 列國記者들에게日本의非人道와國際詐欺를暴露하였다.그러나日本이英國을背景으로妨害하고日敵에게幽閉된高宗帝의親任否認의僞電이오자會議에서의僞約匡正이不可能할뿐아니라 參會할資格조차被奪되었다. 先生의痛憤은極에이르러滿腔熱血로痛論一場하고殺身成仁의殉國으로써外로는列國의似而非正義를糾彈하고內로는國民의殉節救國의大道블敎示하니 때는西紀一九○七年七月十四日이었다.韓國에因緣깊은袁世凱의輓章에剖胸淺血示心眞壯節便驚天下人萬里魂歸迷故國千家淚酒哭忠臣豈緣妻子難瞑目爲報君王不有身大義堂堂懸日月泉臺應結夷齊隣先生의遺骸는海牙國立公園에安葬하고生前에血盟의友이던 李相卨先生의親筆로李儁一八五九年韓國北靑에서出生하여一九○七年和蘭國海牙府에서殉節하다라고誌하였다. 先生의遺骸가海牙에계신지五十六周年인西紀一九六三年十月四日에 祖國大韓民國서울特別市城北區水踰里山一二七番地의一號山麓에安葬하다. 初娶朱氏와의사이에一男一女를기르다長女松鮮長男鏞으로松鮮은士人趙健學에게嫁하고再娶平東李一貞女史에게一女鍾肅을길러서士人柳子厚에게嫁하였다.
西紀一九六三年十月四日
後 學 柳 光 烈 謹撰
坡平后人 尹 禧 采 拜書
이준열사의 말씀
수유동 열사의 묘지 경내에 건립
국민장 장례위원과 유지일동(1963. 10. 4 수유리 묘소)
순국 제57주기(유해환국 1주년) 추념제전에 참석한 위원 일동(1964.7. 14 수유리 묘소)
묘전 입구에 홍전문(紅箭門) 중건
이준열사기념사업회(1991. 12. 3)
묘소앞홍전문건립
높이 4.8m, 기둥둘레 1.2m, 폭 4.1m
이준열사기념사업회 김형목(金炯穆) 이사장과 이상순(李相淳) 이사의 특별 찬조와 김시대(金是大) , 이선준(李善俊) 이사의 헌신적인 노력 그리고 김영만(金英萬) 도봉구청장의 협조로 묘소앞 홍전문이 건립되었다.
1983. 7. 14
그 후 마멸직전에 놓였던 홍전문이 본사업회 이선준 회장의 특별 찬조와 이사들의 협찬 그리고 배의순(裵義淳), 김지택(金智澤) 두분의 기공(技工)으로 재건되었다.
1991. 12. 3
자유평화수호의 상
1992년 3월 25일 북청군민회 부회장 차동수 여사의 성금으로 「자유평화수호의 상」이 보수 중건되었다.
「자유평화수호의 상」 보수 중건 제막식 참석자 일동(1992. 3. 25)
장충단에 동상 건립
1964년 7월 14일 순국한지 57년 되는 날 비가 내리는 가운데 유서 깊은 장충단 공원에서 정부요인과 내외귀빈, 사회단체 인사들 그리고 남녀학생 대표들과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열사의 동상 제막식을 엄숙히 거행하였다. 총공사비는 4백만원이며, 높이 31.5척으로 근 1년만에 완공되었다.
이 동상은 조각가 송영수 서울대학교 교수가 조각했으며 글씨는 서예가 김기승씨가 썼다.
박정희 대통령은 치사에서 「이 중차대한 시기에 이 준열사의 우람한 동상을 건립하여 호국애족의 귀감을 길이 보전케 되었음은 국가적 경사」라고 말하였다.
일성 이 준열사의 부인 이일정(李一貞 여사)
한국여성운동의 선구자로서 열렬히 활동해 오던 이일정 여사는 이 준열사가 가신지 28주년이 되는 1935년에 못내 조국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일제의 심한 눈초리 때문에 간략한 장례와 아울러 불광동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딸 종숙(鍾肅)이가 아버지인 열사에게서 배워오던 모필글씨로 「節士李偶氏夫人李一貞氏幕」라는 묘표를 써서 좋은 돌에 새겨 세웠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자주 와서 태평양전쟁이 날로 심해져가니 지방으로 소개하라고 성화였다.
성화에 못이겨 한때 시골로 피난 갔었다. 그 피난처에서 8 • 15 해방을 맞이하였다. 다시 서울에 오자마자 종숙은 곧 어머니의 묘소를 찾아갔으나 비석이 행방 불명이 되고 말았다.
필경 왜놈들의 소행이러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6 • 25동란 때 피난을 갔다와 보니 묘지마저 동네로 변해버리고 일정의 묘소는 위치조차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한가지 다행한 것은 일정의 묘비가 1973년 7월 불광동 우체국의 하수도 공사장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 후 수유리 이 준열사 묘역에 비를 다듬어 세워 길이 보존하도록 하였다.
수유리 이 준열사 묘역에 세워진 부인 이일정 여사의 비